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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 인물


우리 고장의 독립-호국-민주 보훈인물을 소개합니다.
양진여 (梁振汝)
1862-05-11 ~ 1910-05-30
광주 광산
호남의병장
"양진여"
양진여 선생은 1862년 전라남도 광산군 서창면 벽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07년 10월경 30여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주와 담양 경계에 있는 대치산을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은 광주, 창평, 나주, 장성 등지를 의병활동 주 무대로 대치산, 추월산 등을 이동해가며 유격전술로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습격하여 격퇴하였다. 1909년 8월 25일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일본 군경에 붙잡혀 1910년 대구형무소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8년 전남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 ㅇ 1908~1909년 광주, 창평, 나주,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 ㅇ 1910년 체포되어 사형집행으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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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술 (吳成述)
1884-05-15 ~ 1910-09-15
광주 광산
호남의병장
"오성술"
오성술 선생은 1884년 전라남도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참봉 벼슬에 있었으며,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약 1만평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했다. 선생은 최익현 선생의 시국강론을 듣고 나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907년 김태원 의병장의 의병군에 참여하여 참모로서 활동하며, 고창·영광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1908년 의병장으로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황도현 등 친일밀정들을 처단하였다. 1909년 8월 일본 영산포 헌병대의 이른바 ‘폭도토벌대’에 맞서 싸우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붙잡혀 1910년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7년 김태원 의병장 의병군에 참여하여 참모로 활동 ㅇ 1908년 의병장으로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 ㅇ 1910년 체포되어 사형집행으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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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奇參衍)
1851-01-18 ~
전라남도 장성
호남창의회맹소 수장
"기삼연"
기삼연 선생은 1851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어린 시절 당대의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성리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널리 학문을 섭렵하였다. 선생은 1896년 전남 장성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에는 호남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을 규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연합 의병 지휘부를 결성하여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은신처가 탄로나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순국은 이후 의병들에게 자극제가 되어 호남창의회맹소는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더욱 부상하게 되었다. ▣ 주요 공적 ㅇ 1896년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킴 ㅇ 1907년 영광 수록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고 의병장으로 활동 ㅇ 1908년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일본군의 흉탄에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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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 (高光洵)
1848-02-07 ~ 1907-10-16
전라남도 담양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고광순"
고광순 선생은 1848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의 가문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뜻을 같이하던 기우만, 기삼연 등과 연락을 취하며 각 고을로 격문을 전파하면서 처음으로 의병규합에 나섰다. 1906년 담양 창평에서 5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를 의병군 본부로 삼고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라는 뜻의 ‘불원복(不遠復)’ 세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일제 군경과 결사 항전하다가 1907년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895년 광주 의병군 참여 ㅇ 1906년 창평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 ㅇ 1907년 연곡사에서 전사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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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金泰元)
1870-09-16 ~ 1908-04-25
전라남도 나주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김태원"
김태원 선생은 1870년 전남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전남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였으며, 고창 문수사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이후 선생은 의병군의 선봉장에 임명되어 나주·함평·장성·무안·담양 등지를 차례로 점령·공격하며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1908년 설날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당시 강력하기로 이름난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을 전후하여 호남의소(湖南義所)의 이름으로 독립하여 동생 김율과 의병항쟁을 계속했다. 일제 군경의 집중적인 진압작전에 굴하지 않고 혈전을 계속하던 선생은 어등산에서 1908년 일제 특설순사대와 맞서 싸우다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7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으로 활약 ㅇ 1907~1908년 나주·함평·장성·무안 등지에서 일본군 격파 ㅇ 1908년 어등산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 중 전사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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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도 (奇山度)
1878-10-16 ~ 1928-12-04
전라남도 장성
을사 5적 처단 시도
"기산도"
기산도 선생은 1878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호남의병장 기삼연의 손자이며, 구례 연곡사에서 순국한 고광순 의병장의 사위였다. 1905년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에 서명한 을사5적의 처단을 계획하였다. 1906년 을사5적 중 한명인 이근택을 습격하여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중상을 입히는 것으로 그쳤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 등 을사5적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 왜병의 경호를 청하였다고 한다. 또한 선생은 1919년 김철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군자금 모금활동으로 인해 일제에 체포되었다. 이후 징역 3년형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자택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5년 결사대를 조직하여 을사5적 처단 추진 ㅇ 1906년 을사5적 가운데 이근택 처단 시도 ㅇ 1919년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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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梁漢默)
1862-04-29 ~ 1919-05-26
전라남도 해남
민족대표 33인
"양한묵"
양한묵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이 37세가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이후 손병희를 도와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고 천도교의 근대화에 앞장섰다. 1905년에 귀국하여 친일파로 변절한 이용구에 대항하여 헌정연구회를 조직했고, 입헌군주제의 실시와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손병희 등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적극 참여하기로 약속하였고, 27일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검토한 뒤 그 취지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심한 고문으로 56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5년 민족의 정치의식 고취를 위해 헌정연구회 설립 ㅇ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으로 3·1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 옥중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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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張錫天)
1903-02-25 ~ 1935-10-18
전라남도 완도
제2차 광주학생항일운동 주도
"장석천"
장석천 선생은 1903년 전남 완도군 신지도에서 출생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상과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선생은 4개월 만에 대학을 중퇴하고 광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광주 지방의 학생운동단체인 성진회를 지원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격려하였다.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학생 행동지도를 전담하였다.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항일투쟁궐기를 촉구하는 격문 약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다시 경성방직공장 종업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만성위장병이 극심해져 보석 출감하였으나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광주 자택에서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26~1927년 광주의 학생운동단체 성진회를 지원 ㅇ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항일 학생투쟁을 지원 ㅇ 1932년 경성방직공장 직공들의 항일의식을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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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 (金元國)
1870-11-11 ~ 1909-12-05
광주 광산
무등산이 나은 형제 의병장
"김원국"
김원국 선생은 1870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1906년 3월 동생 김원범과 함께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 김원국은 그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9월에는 기삼연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이어 12월에는 김준과 합진하여 4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9월 5일 의병장 조경환과 광주군 선암시장에서 만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나 이듬해인 1909년 1월에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선생은 남은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대장을 맡아 투쟁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함평을 근거지로 하여 광주, 나주, 능주, 담양, 장성,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 5월 19일 불갑산에서 적과 교전 중 부상을 입고 요양하던 중 6월 10일 밤 일본군이 기습하여 체포되었다. 이후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5일 불갑산에서 교전 중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6년 아우 원범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킴 ㅇ 1909년 불갑산 전투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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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범 (金元範)
1886-01-09 ~ 1909-09-02
광주 광산
무등산이 나은 형제 의병장
"김원범"
김원범 선생은 1886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3월 형 김원국을 대장으로 하고 선생이 선봉장이 되어 광주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8월 기삼연, 김준이 의병을 일으키자 김준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장성 등지에서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 적 4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1908년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여 전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선봉장이었던 정원집이 전사한 뒤에는 자신이 선봉장이 되어 끝까지 전투를 계속하였다. 특히 일본군 장교 요시다를 사살하는 전투에 참전하여 개가를 올렸으며, 동년 9월 전해산의 명령에 의하여 부하 20명을 거느리고 영광군 황량면에 살던 악명 높은 밀정 변영서를 총살하였다. 1908년 의병장 조경환의 휘하에서 형 김원국과 함께 전남 나주, 함평, 광주 어등산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 전투에서 적과 교전 중 체포되어 광주의 일본군 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9월 2일 스스로 혀를 깨물어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8년 전해산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중군장으로 활동 ㅇ 1909년 무등산 전투에서 체포되어 자결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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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월환 (羅月煥)
1912-10-14 ~ 1942-03-01
전라남도 나주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
나월환 선생은 1912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교류하였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중 청도에서 탈출하였다. 선생은 1939년 10월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청년지사 30여명이 모여 조직되었는데, 선생은 전지공작대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공작대장이었던 선생은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중국 서안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고 한편으로는 하남·화북성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 및 첩보활동을 전개하던 중 1942년 3월 1일 박동운 등 변절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 주요 공적 ㅇ 193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 졸업,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 ㅇ 1939년 중국 서안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여 대장으로 활약 ㅇ 1941년 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초모ㆍ선전 및 첩보 활동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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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 (李景采)
1910-04-06 ~ 1978-03-26
광주 광산
광주학생독립운동 주도
"이경채"
이경채 선생은 1910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광주고보 3학년 재학 중 독서회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28년 동교 5학년 재학 중에는 ‘조선독립선언문’ 등 격문을 인쇄하여 나누어주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에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게 되었고, 선생의 퇴학은 광주고보 학생의 5개월간에 걸친 동맹휴학의 도화선이 되었다. 선생은 동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대학에 입학 후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4년에는 임시정부 기관지 「한국독립보」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6년 9월 중국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육군 제11사에 배속된 후 항일전투에 참전하였다. 선생은 그 후 1949년까지 중국군에 복무하였으며, 국민정부 중앙군에서 장교로 제대하고 귀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25년 독서회에 참여하여 항일격문을 살포 ㅇ 1934년 임시정부 기관지 「한국독립보」발간 참여 ㅇ 193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 입교, 중국육군으로 항일전투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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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환 (曺京煥)
1876-02-14 ~ 1908-12-19
광주 광산
호남창의대장
"조경환"
조경환 선생은 1876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분노하여 1907년 12월 초순 광주·함평 등지에서 이원오, 김태원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생은 의병군의 부대장이 되었다. 1908년 김태원이 전사한 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호남창의대장으로 활약하였고, 담양, 장성을 잇는 대치 고개에서 전해산 의병군과 합세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펼쳐 일본군 수십명을 생포하였다. 1908년 12월경 선생이 어등산에 은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헌병대가 은신처를 급습하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오른쪽 가슴에 두발의 총알을 맞았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짐작한 선생은 왼쪽 품안에 깊이 간직하였던 의병군의 명단을 꺼내 불사른 후 1908년 조용히 순국하였다. ▣ 주요 공적 ㅇ 1907년 함평에서 김태원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평성의 일본군을 급습 ㅇ 1908년 김태원 전사 후 의병장으로 추대, 호남창의대장으로 활약 ㅇ 1908년 어등산에서 일경의 적탄에 맞아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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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하 (尹敞夏)
1908-04-09 ~ 1984-12-29
전라남도 해남
독서회중앙부 조직 주도
"윤창하"
윤창하 선생은 190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28년 6월, 광주고보생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대항하여 일으킨 광주고보 맹휴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는데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9년 6월 동경에서 돌아온 장재성의 지도 하에 선생은 광주시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들과 함께 김기권의 집에 모여서 구체적 활동 방안을 논의하고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동 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조합을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동년 9월에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하였다. 선생은 독서회 및 소비조합 활동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선생은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30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금고 4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또한 독서회 운동과 관련해서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 주요 공적 ㅇ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에 참여 ㅇ 1929년 광주지역학생들과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 ㅇ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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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수 (高光壽)
1929-10-15 ~ 1953-07-18
광주광역시 서구
하늘의 보라매
"고광수"
고광수 공군 대위는 1929년 10월 15일 전라남도 광주시 양동에서 출생하였고 1949년 6월 10일 사관후보생 제1기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51년 8월 5일 공군 소위(군번 50828)로 임관하였다. 1952년 12월 14일 F-51기를 타고 첫 출격을 시작한 고 대위는 전사할 때까지 총 51회를 출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고광수 대위는 1953년 7월 18일 강원도 고성 및 시변리 지구에 출격하여 지상군 근접지원작전을 전개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에 피격되어 애기(愛機)와 함께 장렬히 산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광수 대위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3년 9월 10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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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식 (成灌植)
1928-06-25 ~ 1958-09-24
광주광역시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한
"성관식"
성관식 소령은 1928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나 1951년 3월 수원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1일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적군과 아군 간 전선이 교착되어 고지쟁탈전과 진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성관식 소위는 해병 제1연대 3대대 2소대장에 보직되어 장단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1952년 9월 중공군이 대규모의 인해전술로 진지를 포위 공격해오자 성관식 소대장은 연대의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시키고, 교통호까지 진입해온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임진강 일대 아군 주저항선의 핵심 요충지를 확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성관식 소령은 해병대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에 힘썼으며 1958년 해병대 항공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58년 9월 안타깝게도 비행훈련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1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이에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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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 (徐政佑)
1989-08-13 ~ 2010-11-23
광주광역시
최고의 공용화기 사수
"서정우"
서정우 하사는 1989년 8월 13일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하였고 2009년 2월 해병대에 입대하여 연평부대 중화기 중대에 배속 받아 최고의 전투력을 갖춘 공용화기 사수였다. 2010년 11월 23일 마지막 휴가를 떠나기 위해 연평도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시작되자 부대로 복귀하던 중 적의 포탄에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서정우 하사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0년 11월 30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연평도 포격 도발은 2010년 11월 23일 연평부대의 K-9 자주포 해상사격 훈련 도중 북한이 기습적으로 방사포 170여발을 연평도의 군부대 및 민간시설에 무차별 포격을 감행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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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규 (朴良圭)
1924-02-15 ~ 1950-07-29
전남 나주시 과원동
홑몸으로 용전분투한
"박양규"
박양규 순경은 1924년 2월 15일 전남 나주시 과원동에서 출생하였고 나주경찰서에서 근무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여인 1950년 7월 23일, 광주를 장악한 북한군 제6사단은 목포, 보성, 순천 방향으로 각각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7월 25일 북한군이 나주에 접근해오자 박양규 순경은 앞장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적 정황을 살피기 위해 나주로 파견되었다. 7월 29일 박양규 순경은 나주시 교동소재 나주중학교 내 연돌(굴뚝)에서 매복하여 적의 정황을 살피던 중, 적에게 발각되자 홀로 용전분투하여 적 7명 사살, 5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당시 ‘구국총력나주군연맹’에서는 박양규 순경의 이러한 충의를 기려 1951년 4월 20일 나주시 죽림동에 ‘박양규공 충혼비’를 건립하였으며, 나주경찰서에서는 매년 ‘경찰의 날(10.21)’에 박양규 순경을 추모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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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부택 (林富澤)
1919-09-24 ~ 2001-11-13
전남 나주시 노안면
6․25전쟁의 명장
"임부택"
임부택 육군 소장은 1919년 9월 24일 전라남도 나주에서 출생하였고 1946년 5월 국방경비사관학교의 창설과 함께 제1기생으로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 제1연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6사단 제7연대장으로 38도선 경계임무에 진력하던 중 6·25전쟁의 발발과 함께 춘천, 홍천지구 전투에 임하여 북한군 2개 사단을 괴멸시켰다. 1951년 11월에는 제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되어 공방전이 치열했던 동부전선의 351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1952년 8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제11사단장에 임명되어 휴전협정을 맞았다. 임부택 장군은 6·25전쟁 3년의 기간 거의 전부를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 전장을 누빈 몇 안 되는 장군이었다.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 임부택을 사로잡거나 제7연대를 없애버리라고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한 6·25전쟁의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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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홍선 (徐洪善)
1930-01-09 ~ 1952-02-15
전남 담양군
최후까지 고지를 사수한
"서홍선"
서홍선 소위는 1930년 1월 9일 전남 담양군에서 출생하였고 1951년 6월 10일 갑종 제6기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1월 24일 소위로 임관 후 제3사단 수색중대 제2소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고지쟁탈전이 한창이던 1952년 2월 15일, 강원도 양구 북방의 662고지를 지키고 있던 제3사단 수색중대는 새벽 2시 5분경 강력한 화력을 지닌 적군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서 소위는 당황하지 않고 적군 진형 중앙에 지뢰를 폭발시켜 소대원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적의 공격을 저지해 나갔다. 적군 포격으로 소대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서 소위는 직접 기관총을 사격하며 30m 앞까지 육박해왔던 적들을 섬멸하였다. 뒤이어온 적군이 기관총 진지에 수류탄을 집중 투척함에 따라 서홍선 소위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서 소위의 투혼에 자극을 받은 소대원들은 치열한 사투 끝에 662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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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곤 (金點坤)
1923-04-15 ~ 2014-09-28
전남 화순군 화순면
다부동 전투의 영웅
"김점곤"
김점곤 소장은 1923년 4월 15일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출생하였고 1946년 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하여 6월 15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 12연대장이었던 김점곤 소장은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이자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다부동 일대(마산-왜관-낙동리-영덕 240km)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의 8월 공세를 겪게 되었다.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일까지 약 한 달에 걸쳐 계속된 다부동 전투는 처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다. 김점곤 육군 소장이 이끄는 제12연대는 이 다부동 전투에서 특공대를 편성하여 적 전차 4대를 파괴하는 등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9월 25일부터 반격을 시작한 제1사단은 10월 11일 마침내 38도선을 돌파하고 평양탈환작전에 돌입했다. 사단의 주력부대인 제12연대장 김점곤 소장은 완강히 저항하는 적의 공격을 제압하고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해 국군의 자존심과 명예를 고양하였다. 정부에서는 김점곤 소장의 공훈을 기려 1953년 8월 27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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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일 (韓楨日)
1915-09-02 ~ 1987-07-15
전남 해남군
압록교 전투의 영웅
"한정일"
한정일 총경은 1915년 9월 2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 광주 서중(현 광주제일고)을 졸업하고 1946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2기로 졸업하여 1949년 곡성경찰서장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여, 광주, 순천, 광양까지 북한군에 함락되던 무렵, 곡성경찰서에도 ‘모두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한정일 총경은 곡성을 사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경찰과 의용대원들을 설득해 자원자를 중심으로 전투인력 520명을 꾸려 ‘곡성전투경찰대’를 편성하였다. 1950년 7월 29일 순천에서 남원으로 이동 중인 북한군 3개 중대를 상대로 압록교(섬진강 상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북한군 52명을 사살하고 아군은 1명만이 사망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한정일 총경이 이끈 ‘곡성전투경찰대’는 전쟁 초기 대부분의 유격전이 국군 낙오병과 일반인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과 달리, 탄탄한 조직력을 갖추고 자발적으로 적진에 남아 유격전을 훌륭히 수행했다는 점과, 압록교 전투를 대표적인 경찰 승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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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근 (朴昌根)
~ 1949-05-04
전남 완도군 노화면
육탄 10용사
"박창근"
박창근 상사는 1925년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면에서 출생하였고 1949년 개성 송악산지구 5·4전투에서 적의 토치카(벙커)를 육탄으로 분쇄한 육탄 10용사 중의 한 명이다.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제1사단 11연대에서 복무 중 연대가 제주도로 이동함에 따라 1948년 5월 5일부터 7월 23일까지 한라산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박창근 상사는 개성 부근의 송악산 전투 당시 중화기소대 분대장으로 특공대에 자원하여 육탄공격을 감행, 적의 토치카(벙커)를 파괴하고 1949년 5월 4일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49년 6월 28일 육군 일등상사(현 상사)로 특진과 함께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통일공원 내에는 박창근 상사를 비롯한 육탄 10용사를 기리는 충용탑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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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방오 (余方五)
1928-02-13 ~ 1953-06-09
전남 완도군 청산면
표적이 되어 적진으로 돌진한
"여방오"
여방오 육군 하사는 1928년 2월 13일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출생하였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육군에 입대하여 제12사단 분대장으로 복무하였다. 여방오 하사는 1953년 6월 9일 강원도 소양강 쌍룡고지 일대의 무명고지 전투에서 아군 공군의 폭격을 유도하기 위해 자청하여 황색 표적판을 등에 메고 스스로 표적이 되어 적의 기관총 진지에 접근하였다. 이후 아군 공군기가 여방오 하사의 유도에 따라 강력한 화력을 퍼부었고, 검은 연기가 온 산을 뒤덮으며 적의 기관총 진지는 박살났다. 폭탄세례 속에 임무를 완수한 여방오 하사는 기관총 진지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기회를 포착한 아군은 돌격을 감행해 고지를 탈환하였다. 정부에서는 여방오 하사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5년 3월 1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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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달진 (趙達珍)
1928-11-18 ~ 2008-10-15
전남 순천시 주암면
대전차 특공영웅
"조달진"
조달진 하사는 1928년 11월 18일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에서 출생하였고 육군에 입대하여 제6사단 19연대 3대대 소총수로 복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6월 28일 강원도 홍천 말고개 전투에 참가하였다. 조달진 하사는 말고개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전차를 파괴하였으며, 강원도 유곡 전투에서는 6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4대의 전차를 격파하는 등의 전과를 인정받아 1950년 6월 육군 일등병(현 일병)에서 이등중사(현 하사)로 특진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2계급 특진하는 영광을 안았다. 조달진 하사는 홍천 말고개 전투와 유곡 전투에서의 공로로 1950년 10월 5일 을지무공훈장과 함께 한국군 최초로 미국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정부는 1951년 4월 19일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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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李相垂)
1926-12-18 ~ 1950-10-13
전남 고흥군 도양면
불굴의 투지로 타오른
"이상수"
이상수 소령은 1926년 12월 18일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에서 출생하였고 1948년 7월 공군항공병 제1기로 입대하여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상수 소령은 신예전폭기 F-51 인수단원으로 선발되어 단기간의 교육을 마친 후 북한군 주요 기지를 폭격하며 남하하는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50년 10월 13일 평양 시내의 적 군사시설 폭격명령을 받고 출격한 그는 빗발치는 적의 대공포화 속에서 군용물 창고를 찾아 폭파에 성공하였고, 편대장의 귀환 명령이 떨어졌으나 아직 2발의 로켓탄이 남아있다며 김일성 관저와 북한군사령부 건물을 폭격하기 위해 돌진하였다. 이상수 소령의 로켓탄에 명중한 김일성 관저는 불바다로 변했고 곧이어 북한군 사령부에 공격을 가하던 중 적의 대공포화에 피탄되자 애기(愛機)와 함께 적진으로 돌입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산화했다. 정부는 1951년 7월 1일 공군 소령으로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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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모 (朴正模)
1927-03-20 ~ 2010-05-06
전남 신안군 도초면
서울수복의 숨은 영웅
"박정모"
박정모 대령은 1927년 3월 20일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하였고 1945년 일본 다나베 해병단에 입대하였다가, 조국이 광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해병대 소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용전분투하였으며, 서울탈환작전에서는 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소대원 김칠용, 최국방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서울 중앙청 옥상에 있던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박정모 대령의 태극기 게양에 대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으로 평가하며 표창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후 박정모 대령은 충청북도 금곡 전투 및 원산상륙작전, 강원도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부는 1953년 1월 20일 박정모 대령의 공훈을 기려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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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현
1952-06-19 ~ 1982-10-12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5ㆍ18 민주 유공자
"박관현"
박관현은 전남대학교 법학대학 행정학과에 재학 중 ‘사회조사연구회’의 부회장으로 활동, 들불야학에서 윤상원, 김영철 등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지식과 노동의식을 가르치고 연구하였다. 1980년 4월 9일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 교내 ‘민족민주화 성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가두시위를 결행하여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학생, 시민 등 수 만 명의 인파와 함께 4월 16일까지 연좌시위를 하였다. 5월 7일 자정 무렵, 전남대학교가 계엄군에 점거되자 그는 함께 있던 윤상원의 권유로 여수로 피신하여 은신하여 있다가 1982년 4월 5일 체포되었으며, ‘내란음모죄’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옥중에서 재소자 처우개선과 정치범 차별금지를 요구하며 50일 간 3차에 걸친 단식투쟁을 하던 끝에 그 해 10월 12일 숨을 거두었다. ▣ 묘비문구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라는 유언을 남긴 채 군부독재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산화한 박열사 여기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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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노근
1932-08-05 ~ 2000-01-10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5ㆍ18 민주 유공자
"명노근"
명노근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수습대책위원으로 추대되어 군 당국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군 당국의 일방적 강압으로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5‧18민주화운동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 1980년 6월 25일 체포되었고 내란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84년 전남대학교 교수로 복직하였다. 고문 후유증으로 1년 넘게 병원 생활을 하였으나 굽힘없이 전두환 퇴진과 진상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후 1995년 5‧18기념재단 이사, 1997년 5‧18광주민중항쟁 제17주년 행사위원장을 역임하며 5‧18기념사업 추진에 앞장섰다. ▣ 묘비문구 우리시대의 큰 어른 명노근 교수님! 분단의 땅 척박한 땅에 민주주의 파수꾼 무등산 빛고을 광주의 어진 어버이 한국 YMCA의 머릿돌 남녘 전남대학교의 참스승 님은 지사에서 하느님의 가장 부지런한 아들이었습니다. 그 의지의 구레나룻 그대로 우리들을 일깨워 지켜주소서. -2000년 1월 12일 문병란‧김준태 시인의 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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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1964-03-27 ~ 1980-05-23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5ㆍ18 민주 유공자
"박현숙"
박현숙은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담을 관이 부족하자, 5월 23일 시민군 17명과 함께 관을 구하러 미니버스를 타고 화순으로 갔다. 이들이 탄 버스는 광주와 화순 길목의 주남마을을 지나던 중 마주친 계엄군에게 무차별 총격을 당하였다. 버스는 벌집이 되었고 박현숙을 포함한 15명이 즉사하였으며 계엄군은 부상자 2명을 주남마을 뒷산에서 사살한 뒤 암매장하였다. ▣ 묘비문구 참된 자유와 민주화를 위하여 촛불처럼 제 몸을 태우는 사랑과 희생을 몸소 실천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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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애
1957-02-06 ~ 1980-05-21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5‧18 민주 유공자
"최미애"
최미애는 밑으로 두 동생을 둔 장녀로 무뚝뚝하지만 속 깊은 남편과 결혼하여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그날, 전남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남편 김충희 씨는 제자들을 찾겠다며 집을 나섰고 그녀는 남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임신한 몸을 이끌고 마중을 나갔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고, 그때 시위대와 멀리 떨어져있던 그녀가 총성과 함께 쓰러졌다. 시민들이 쓰러진 그녀에게 달려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머리에 총알을 맞아 그대로 절명하였고, 이내 뱃속의 아기까지 사망하였다. ▣ 묘비문구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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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1951-08-19 ~ 1980-05-27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
5‧18 민주 유공자
"윤상원"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지외교학과 재학 당시 연극반 활동을 하며 학내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졸업 후 들불야학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쳤으며, 1980년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9호까지 제작‧배포하며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서 계엄군이 진입하기 직전, 도청에 남아있던 여성들과 고등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하고 자신은 도청을 사수하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후 1982년 2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그의 대학 후배이며 노동운동가인 박기순(1978.12.27. 사망)과의 영혼결혼식이 치러졌고 이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 묘비문구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5․18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 중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하다. 박기순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학과 재학 중 노동자 교육 운동 중 과로로 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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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순
1914-12-15 ~ 2006-10-14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5‧18 민주 유공자
"홍남순"
홍남순은 1963년 변호사가 되어 인권활동에 매진하였다. 1970년대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며 시국사건을 무료로 변론하였으며,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학살에 항의하며 행진하다 내란수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86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 19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2006년 사망하였으며 뒤늦게 2019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 묘비문구 자유와 민주, 정의의 등불을 밝힌 그를 세상 사람들은 의인(義人)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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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1948-07-14 ~ 1998-08-16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5‧18 민주 유공자
"김영철"
김영철은 들불야학 교장으로 활동하며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이 광주 시민과 학생들을 상대로 만행을 저지르자 이를 알리는 대자보와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항쟁 기간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기획실장을 맡으며 5월 27일 새벽까지 윤상원 열사와 함께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체포되어 1981년까지 투옥 당하였다. 이후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에 시달려 1984년부터 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오다 1998년 8월 19일 영면하였다. ▣ 묘비 문구 광주 빈민운동의 선구자요 영원한 등불인 고 김영철 투사는 도청항쟁지도부 기획실장으로서 광주민중항쟁을 최후까지 모범적으로 이끈 지도자입니다. 항쟁 이후에도 불굴의 투혼으로 항거하다 병마의 고통 속에 마침내 이곳에 영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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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선
1954-10-13 ~ 1998-09-10
대전광역시 중구 문창동
5‧18 민주 유공자
"박효선"
박효선은 1970년 중반 전남대학교 재학 시절 소설가 황석영 등과 더불어 광주에 문화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5·18항쟁 지도부 대변인 윤상원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노동현실 고발극 <우리들을 보라>를 만들어 공연하였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박효선은 항쟁 지도부 홍보부장으로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투사회보』, 『시민에게 알리는 글』을 발행하였고, 이로 인해 20개월 동안 수배생활을 하였다. 19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단하여 남도민중의 저항정신을 중심으로 5·18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연극으로 그리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998년 5월 오월 영상 <레드브릭> 제작에 몰두하다 과로로 쓰러져 간암 판정을 받고 44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 묘비문구 오월 정신을 불꽃처럼 노래하고 춤추던 우리들의 광대 여기 고이 잠들다. 못 다한 님의 꿈과 사랑, 우리들 가슴에 평화와 그리움의 민들레로 영원히 피어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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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1912-03-28 ~ 2003-07-08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5‧18 민주 유공자
"조아라"
조아라 여사는 광주 수피아여고 재학 당시에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다. 졸업 후에는 YWCA와 인연을 맺고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서울 출장길이었으나 “광주 시민을 내버려둘 수 없다”며 곧바로 광주로 되돌아왔고,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구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도 구속자와 부상자들을 적극적으로 돌본 조아라 여사를 시민들은 ‘광주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여사는 광주의 여성운동에 앞장서 사비를 털어 광주YWCA회관 건립기금을 내놓았고, 1992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한국 여성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조아라 여사는 여성운동과 민주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광주시민대상, 무등여성대상, YWCA 전국대회 대상을 받았으며, 2003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 ▣묘비문구 마태복음 5장.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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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1933-02-15 ~ 2010-04-03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5‧18 민주 유공자
"이광우"
이광우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신분으로 ‘시민수습대책위’에 참여하여 광주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당시 보안대에 끌려가 약 4개월 동안 갖은 고문을 당하고 10월 24일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으나 항소하여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출소 후 대학에서 해직당한 그는 튀김장사를 하며 찾아오는 제자들과 시국을 논하다 동료교수들의 도움으로 1984년에 복직되었다. 이후 그는 5·18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등으로 활동하며 5·18기념사업 추진에 앞장섰다. 1998년 정년퇴임 이후 5·18기념재단 이사장, 광주 YMCA이사장을 역임하고 2010년 4월 3일 숙환으로 타계하여 4월 5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 묘비문구 오월 광주의 산증인! 자전거 교수님. 죽을때까지 민주화투쟁을 하시다가 떠나신 우리의 자랑. 하나님 품에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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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1927-09-27 ~ 2001-12-21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5‧18 민주 유공자
"송건호"
송건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수많은 언론사의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후 기자들의 강제 해직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이에 책임을 느끼고 사직하였다. 이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맡고 각종 저술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종사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현장에는 없었지만, 계엄 당국이 5‧18민주화운동의 배후사건으로 날조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그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 후 출소하였다. 이후 1984년 해직 언론인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당시 진행되고 있던 민주화운동을 여과 없이 보도하여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 묘비문구 참 언론인 어두운 시대에 홀로 한국 현대사를 올곧게 세우셨으며 생각과 말, 글과 행동이 한사코 일치하시고 그 진솔하고도 검소한 삶은 뒷 사람들이 높이 따르니 선생께서는 참으로 민주통일 언론운동의 사표이시라. 우리시대의 큰 바위 얼굴 청암 송건호 선생 여기 5ㆍ18의 영령들과 함께 잠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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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1935-01-07 ~ 1997-02-14
광주광역시 북구 풍향동
5‧18 민주 유공자
"김태진"
김태진은 전남대학교 학생처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과 뜻을 모아 1980년 5월 17일 시민, 학생, 교수가 함께하는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진행하였다. 다음날인 5월 18일 일요일, 계엄군이 전남대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을 가혹하게 진압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곧바로 출근하여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을 저지하고 사태를 수습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해 7월 3일, 내란소요 방조죄, 계엄법 위반죄 등으로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하여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정부의 감시와 압박은 계속되었고, 조사과정에서 당한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97년 2월 끝내 사망하였다. ▣ 묘비문구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대 학생처장으로 재직 중 세상에 바른 소리 밝히셨다. 후대를 위한 높은 뜻 채 알리기 전에 아! 주님께서 먼저 아끼시어 영면의 안식을 내리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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